안녕하세요? 나노하입니다.
케이온 영화화 이후 오랜만에 써보는 애니칼럼인데, 이번 시간에는 조금 불편한 주제를 다뤄보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많은 분들의 심기를 건드리는 주제의 글은 별로 쓰고 싶지 않습니다만, 최근에 유저들 사이에 큰 논란이 되고 있고, 꼭 한번은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성이 느껴지는 부분이기에 이렇게 글을 씁니다.




- '열역학 제 1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인터넷

물리학 중에서 에너지와 열, 일의 관계를 연구하는 '열역학'이라는 분야가 있다. 이 분야 내에서 가장 기초적인 법칙 4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열역학 제 1법칙'이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라고도 불리는 이 법칙의 정의는 따로 있지만, 풀어쓰면 다음과 같다.

"닫힌 역학계에서 에너지의 형태가 어떻게 바뀌더라도 총 에너지의 합은 일정하다"

 


예를 들어 한 그루의 나무가 있다고 가정하자. 열매는 태양의 빛 에너지와 양분을 흡수하여 열린다. 여기서 빛 에너지와 양분은 열매라는 에너지의 결정체로서 변화가 일어날 뿐이지 그 에너지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물리학 수업도 아닌데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오는가? 걱정하지 말자. 필자가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건 어디까지나 어떤 현상의 비유를 위해서일뿐이다. 재미있는 것은 필자와 같은 공학도들 사이에서는 이 법칙이 농담처럼 다음 의미와 같이 쓰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공짜란 없다"


그렇다. 열매는 빛과 양분이 있어야 열린다. 빛과 양분이라는 들어간 에너지가 없는데 열매라는 에너지가 나온다는 것은 에너지 보존의 법칙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요컨데 세상에 공짜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간단한 법칙이 통하지 않는 곳이 있으니, 그곳이 바로 인터넷이다. 우리는 인터넷 속에서 많은 것을 누리며 살고 있다. 요즘 유행하는 음악을 듣는 데 걸리는 시간은 30초. 최신 영화와 드라마를 보는 데에는 3분. 100만원 짜리 프로그램을 설치하고 실행하는 데에는 5분이면 충분하다. 물론 모두 공짜다. 우리는 말 그대로 빛과 양분 없이도 열매가 열리는 그런 기적의 시대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 재앙의 시작

이렇게 열린 공짜 열매를 따먹는 소비자들을 보다못한 제작자들과 정부가 철퇴를 들기 시작했다. 불법 음반, 영화를 제공하는 자들에게는 특히 엄격한 처벌이 가해졌으며, 그것을 이용한 사용자들도 처벌하겠다고 엄포를 놓은 것이다. 처음에는 반발도 심했지만, 점점 합법적인 경로가 개척되고 소비자들도 납득할만한 가격에 시스템이 제공됨으로써 소비자들의 인식도 변화하기 시작한 것이 아주 최근이다.

재패니메이션은 이 범주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 철퇴의 범위에 들어가지 않은 몇 개 부분이 있었는데 애니메이션, 특히 재패니메이션이 그 중 하나였다. 국내에서 영화와 음반의 수요와 애니메이션을 수요를 비교해본다면 그야말로 새발의 피다. 시장의 규모면에서 애초에 거론할 가치가 없다. 더군다나 우리나라에서 만든 것도 아닌 이웃나라 일본에서 만든 것이다. 우리것 지키기도 벅차다보니, 일본 애니메이션까지는 지킬 여력이 없었던 모양이다. 덕분에 애니메이션을 소비하는 유저들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애니메이션을 주고 받기 시작했고, 모든 재앙은 여기서 부터 시작되었다.




- 애니플러스 등장과 제휴의 덫


그러던 2009년 12월, 애니플러스가 개국했다. 야심차게 출범과 함께 그들은 신작 애니메이션을 빠르게 공급하고, 모든 애니메이션 방송을 자막으로 방송할 것을 약속했다. 투니버스, 애니맥스를 비롯한 애니메이션 방송국들이 더빙판에 재방송의 재방송을 고수하고 있었던터라, 기존 시스템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애니메이션 시청자들은 환영했다.


그리고 2010년 4월, 애니플러스는  「엔젤비츠」 ,  「회장님은 메이드사마」 ,  「워킹」 ,  「일기당천 4기」 를 자막으로 방송했다. 그들이 개국초기에 내걸었던 유저들과의 약속을 지킨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긴 것은 다른 곳이었다. 그 방송 방법 자체가 한일 동시 방영이었다는 점.

빠른 신작의 공급을 위해 일본과 동시 방영 하겠다는 데 뭐가 문제가 되는 걸까. 애니플러스가 국내에 방송을 내보내기 위해서는 방영권을 필요로 한다. 이는 애니플러스 외에 방송되는 영상은 모두 허가를 받지 않은 불법 컨텐츠로 간주된다는 이야기와 맞물린다. 원칙대로라면 시중에 돌아다니는 애니메이션 동영상들을 모조리 막아야 하겠지만, 애니플러스는 여기에 '제휴'라는 개념의 프리미엄을 붙여 파는 형식을 채택했다. 불법 컨텐츠를 인정할 수는 없지만, 방영권을 가진 우리에게 일정 비용을 지불하면 그 컨텐츠를 막지는 않겠다는 의도이다.

모 웹하드 업체의 검색 결과. 모두 제휴가 걸려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다름아닌 '돈'에서 생긴다.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애니메이션 동영상 파일의 크기는 약 300MB 내외. 애니메이션을 주고 받는 주요 경로를 유저들에게 제공하는 웹하드 업체들은 보통 3~4MB를 약 1원에 공급하고 있다. 따라서 애니메이션 한 편을 다운로드 받는 데에는 100원 정도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다만, 여기서 '제휴'라는 프리미엄이 붙게 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100원 했던 파일이 순식간에 500원으로 상승한다. 100원과 500원의 차이는 왠지 큰 것 같지 않지만, 이것이 1쿨 시리즈로 놓고보면 1300원과 6500원이라는 차이로 둔갑한다. 파일 다운로드비를 제외하면 아무런 비용도 필요로 하지 않던 것이 갑자기 5배나 상승했으니, 유저 입장에서는 그 놈의 제휴라는 게 뭔지 속이 터질 지경이다. 거기에 올해 2011년 1월에는 애니플러스가 무려 10편의 신작 방영권을 확보함으로써 사실상 제휴의 범주안에 들어가지 않는 작품이 없을 정도로 그 숫자가 많다. 이 쯤되면 애니플러스 망해라는 악담이 쏟아질만하다.

올해 신작 중 인기작 상당수가 애니플러스 방송 목록에 포함되었다




- 우리는 그것이 불법인지 모른다

이제 상황은 소위 말하는 정품 이용자와 불법 이용자의 신경전으로까지 번진다. '너희 같은 인간들 때문에 애니메이션 산업이 망한다' 부터 '그래, 너희는 돈 많아서 좋겠다' 까지. 이제는 거의 감정싸움에 가깝다. 도대체 무엇이 우리를 이토록 극단적인 상황으로 몰아간 것일까.

지금의 사태는 애니메이션에 국내의 합법적 컨텐츠의 부재에서 비롯된다. 애니플러스의 출현 이전에 국내에서 합법적으로 즐길 수 있는 방법은 케이블 TV 방송과 정발 DVD의 구입 정도로 경로가 지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여기에 공중파 애니메이션의 몰락과 애니메이션에 대한 곱지 못한 시선들은 실질적으로 국내에 대한 애니메이션 공급 자체를 점점 차단시켜 버리게 되었다. 물론 아마존 등지를 통해 해외구매대행을 이용하는 방법도 있지만, 이건 비용이 너무 부담스럽다.

국내에 정발된 스즈미야 하루히 우울 DVD. 그나마 정발된 작품도 매우 한정적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소비자들은 자연스럽게 불법 컨텐츠의 공유 시장으로 집중되었다. 무료로 혹은 약간의 다운로드 비용만 지불하면 누구나 쉽게 고화질의 영상을 다운받을 수 있다는 건 뿌리치기 쉬운 유혹이 아니다. 사실 여기까지는 비단 애니메이션만이 겪었던 문제는 아니다. 영화나 음반, 국내 드라마 들도 이런 문제를 과거에도 겪었고 현재도 겪고 있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이들은 합법적인 컨텐츠의 경로를 다량 보유하고 있으며, 그만큼 불법 컨텐츠의 단속과 처벌도 강력하다는 사실이다.

반면 애니메이션은 이런 불법적인 루트가 너무 오랜시간동안 이용되어왔고, 그것이 고착화되었다는 데 문제가 있다. 오래전부터 그래왔고, 내 주위 사람들도 그렇게 사용했기 때문에 그것이 부정이라는 걸 깨닫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꽤 많은 유저들은 웹하드 업체에 지불하는 다운로드 비용을 정당한 비용을 주고 구입하는 행위로 오해하고 있는 경우도 많았다. 개인적으로도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필자도 그런 유저 중에 한 사람이었다. 그것이 당연한 게 아니라는 걸 깨달은 것은 1년 전, 비싼 돈을 지불하면서 애니메이션을 즐기는 주위 블로거들의 지적 덕분이었다. 분명 불법 컨텐츠의 이용이 권장할만한 행동은 아니다. 다만, 최소한 소비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합법적인 루트가 제대로 구축되었다면 지금처럼 불법이 합법으로 둔갑하는 기형적인 사태까지는 막을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 애니플러스, 넘어야 할 산은 많다.

유저들의 빈축을 사고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애니플러스가 합법적인 루트를 개척했다는 점은 고무적이다. 또한 단순히 방송에만 그치지 않고, 다운로드 서비스와 IPTV, 스마트폰의로의 확장 등 다양한 서비스들도 선보이고 있어서 타 방송국과 차별화된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물론 앞서 지적한 제휴의 덫이 있긴 하지만, 애니플러스가 공식적으로 제공하는 영상의 경우 편당 200-300원 정도의 선에서 해결할 수 있어서 가격면에서도 그리 부담스러운 수준은 아니다.

이벤트를 이용하면 편당 100 ~ 200원 내외로 이용 가능하다


그러나 애니플러스가 앞으로 넘어야 할 산은 많다. 특히 컨텐츠 질적 저하는 앞으로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로 꼽힌다. 요즘은 불법 컨텐츠도 진화에 진화를 거듭해서 대다수의 작품들이 고해상도의 HD 영상을 제공하고 있으며, 방송이 끝난 구작들의 경우 DVD/BD 영상까지 버젓이 유통되고 있다. 이에 반해 애니플러스가 제공하는 영상 자체는 육안으로봐도 불법 컨텐츠가 제공하는 화질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으며, 일부 영상은 화면 깨짐, 프레임 저하 현상도 종종 목격된다. 게다가 애니메이션 방송사 답지 않은 오역과 의역이 난무하는 자막까지 다수 연출하고 있어서 정품 컨텐츠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불만이 제기되고 있다. 이렇게 서비스 할 거라면 차라리 불법 컨텐츠가 낫겠다는 목소리도 심심찮게 들린다. 방송사도 엄연한 기업이다. 돈을 받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이라면 유저들의 의견을 십분 반영할 의무가 있다. 애니플러스가 앞으로 이용자의 꾸준한 확보를 원한다면, 질적 개선에 대한 노력이 절실해 보인다.

질적 향상은 앞으로 그들이 해결해야 할 숙제





- 이제는 바뀌어야 할 때

좋든 싫든 애니플러스가 애니메이션에 합법이라는 불을 지폈다는 건 변함없는 사실이다. 여기에 장작을 넣느냐, 물을 끼얹냐는 앞으로 방송사와 그것을 향유하는 소비자들에게 달려있다. 아직까지는 불법 컨텐츠가 성행하고 있는 만큼, 유저들 사이에 자발적인 자정 능력이 현재로서는 절실하다. 불법 컨텐츠가 잘못되었다는 점을 알리고, 공식적으로 제공되는 컨텐츠를 이용할 수 있도록 서로 권장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또한 이에 발맞춰 애니플러스도 정상적인 방법으로 컨텐츠를 이용하는 소비자들이 납득할만한 질적 향상 역시 필수적으로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 개인적인 바램이 있다면, 국내 애니메이션 시장도 애니플러스 하나라는 루트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제 2, 3의 애니플러스를 만들어 경쟁 구도를 형성함으로써 국내 시청자들이 보다 합리적인 소비를 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으면 한다.




- 열매는 열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필자는 이제 다시 '열역학 제 1법칙' 이야기로 돌려 이 긴 글의 끝을 맺으려 한다.
물과 양분이 있어야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이것이 올바르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빛과 양분이 없이도 열매가 맺는다는 사실을 어느 순간 당연하게 여기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시험대에 올라와 있다.
지금이라도 빛과 양분을 넣어줄 것인가. 아니면 그대로 열매만 따먹을 것인가.
선택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소비자의 몫이다.
한가지 확실한 건 이대로라면, 나무에 더 이상 열매가 열리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뒤늦게 우리가 왜 그 때 빛과 양분을 주지 않았었는지를 한탄하면서 말이다.


reTweet 올포스트 다음뷰 구독 한RSS추가

Live Traffic Feed